나는 살아오며 여러 번 ‘장소를 잃는 경험’을 했다. 제2의 고향이라 믿었던 인천에서의 2년은 짧았지만 진심이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욕망이 나를 서울로 이끌었지만, 제3의 고향이 된 서울은 냉정했다. 집값이 나를 내몰았고, 서촌에서 북촌으로,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거듭했다. 언젠가부터 짐을 싸서 일하러 가는 일이,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명절마다 방문한 대전의 골목길은 문 닫는 가게와 새 간판이 공존하는 변화의 바람 속에서 서서히 낯선 모습으로 변해갔다. 1996년에 문을 연 세이백화점은 CGV만 남기고 2024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전의 향토서점 계룡문고도 코로나19의 긴 시간을 버텨냈지만, 같은 해 끝내 문을 닫았다.   유년의 시간을 함께해 온 장소들의 폐업 소식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자라난 도시의 기억이 서서히 지워지는 경험이었다. 고향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 그렇다 하더라도, 고향이라는 자리가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건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문득 되돌아보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을까.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든 전문가도, 외길을 걸어온 외골수도 아니다. 신기하게도 내가 원하는 일들은 언제나 고향 밖에 있었다. 타지에서 도전하며 살아오며 깨달은 건, 멀리서 반짝이고 특별해 보였던 도시와 기회들도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올해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통학 1시간 30분 거리의 근처에서 새 직장을 구했다. 서른 중반이 되어 여전히 ‘신입’ 역할을 자처하니 부끄럽기도 했다.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고향을 떠났으면서도,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냐.”   하지만 새로운 직장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큰 행사를 운영하는 매니저였지만, 30여 명의 스탭을 관리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버텨온 만큼 남들도 버텨야 한다고 믿는 딱딱한 선배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것만이 퇴사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 마음 어딘가에 ‘나’로서 살고 싶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후 ‘대전 0시 축제’를 즐기고 돌아오던 날, 대전역 동광장 뒤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소제동 골목 인근이었는데, 재개발이 중단된 채로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가로등이 거의 없어 어둑했고,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의 인기척도 드물어 스산한 공기가 골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상황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도시의 안전 문제라고 느꼈다. 처음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남자친구의 권유로 ‘대전청년주간 아이디어 배틀’에 참여하게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발표의 기회는 종종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마음이 달랐다. 이건 누군가의 불편을 바꾸기 위한 내 첫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꿈돌이 안심 귀갓길>— 내 고향 대전의 상징적인 캐릭터 ‘꿈돌이’가 몽둥이를 들고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장면은 어쩐지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 불빛 아래라면, 늦은 밤 귀갓길의 여성들도 조금은 안심하며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가로등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구조물이다. 항상 불빛이 꺼지지 않고 비춰야 하기에, 스마트 장치를 통해 상태를 점검하고 관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안했다. 그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 도시가 누군가에게 여전히 안전하고 따뜻한 장소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제안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아마도 다시 이 고향에 발을 붙이고 정착하고 싶다는 신호였을 것이다. 낯선 곳의 손님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진정한 내 자리를 되찾고자 한 몸짓이었다.   나는 성격상, 한 사람의 입장만 고집하기보다 이 사람의 입장도, 저 사람의 입장도 함께 고려하려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명확한 의사가 있어도 정작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자연스레 나는 늘 누군가를 보조하거나, 팀의 뒤를 받치는 사람이 되곤 했다.   그러나 고향 대전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무대의 한가운데 서는 경험, 즉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 이처럼 대전은 내게 탈주의 장소이자 귀환의 장소다. 나는 여전히 그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나를 새롭게 엮어가고 있다. 서울과 인천에서의 화려한 인맥, 그리고 소비의 욕망에 대한 갈망과 염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이제는 조금씩 나다운 속도를 되찾아가고 있다.   최근, 이 글을 쓰던 중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살아생전의 외삼촌은 언제나 당당하고 품격 있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방광암 3기 진단을 받고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손길에 의지한 채 누워계신 모습을 보며, 깊은 허무감과 슬픔에 잠겼다.   그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살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과 ‘삶의 지속’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나는 ‘살아 있음’ 그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늘 일만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며, 조금은 속도를 늦추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이곳,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일상을 나누는 시간 또한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또 다른 회복의 시간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