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압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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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은 처음에 시꺼멓고 못생긴 덩어리다. 그 덩어리는 뜨겁게 달궈지고, 식혀지고, 다시 달궈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압연(壓延)’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레일 사이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으며, 덩어리는 납작해지고 길어지며 쓰임새 있는 모양을 갖춘다. 더 튼튼하고, 더 단단해지기 위해 스스로 모양을 바꾸는 과정이다.

나는 이 공정을 처음 들었을 때, 묘하게 사람들의 삶이 떠올랐다. 우리는 의도치 않은 압박 속에서도 모양을 바꾸고, 견디고, 다시 나아간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각자의 ‘압연’을 견디는 일일지도 모른다. 포항은 그런 도시다. 뜨거운 쇳물이 식고, 다시 달궈지며 형태를 바꿔 세상 곳곳으로 보내지는 곳. 이곳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모여든 사람들이 있다. 결혼해서 온 사람,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 도망치듯 온 사람. 삶의 압력을 견디며, 자신만의 모양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이 글은 그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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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진

대구도 그렇게 썩 도시는 아니었다. 더 좋은 곳과 덜 좋은 곳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어김없이 전자를 고를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내 맘처럼 선택할 수 있지 않았다. 현실은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컸다. 무언가 재능은 많다고 느끼지만, 아직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갖지 못한 나이 26살. 이것저것 도전하고 부딪치기에는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가장 편안해야 하는 집에서 마저도 나는 취업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옆집 혜진이 엄마가 그러더라. 뭐라더라? 혜진이 회사가 서울에 있다고... 서울은 거 너무 비싸잖아. 적당히 대구나 부산으로 가. 알겠지?”

엄마가 넌지시 건네는 말에 상처를 입고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좋아 보이는 회사는 마음만 있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는 별로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직업이란 것을 찾기도 전에 지역을 선택하고 있는 엄마에게 한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침을 삼키듯 꿀꺽 그 마음을 삼켜버렸다.

그 당시 나는 집에서조차 쪼그라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이에 sns를 켜보면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쏟아진다. 시골에 가서 감자를 캐고 살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는 그다지 조회수를 타지 못하고, 높은 고층 빌딩에서 오피스룩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나는 이렇게 성공했어요라는 말의 동영상에는 미친듯한 하트가 쏟아진다.

‘아 멀다 멀어...’

마음도, 거리도 모두 멀다고 느꼈다. 그리고 도피처럼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한 평생 성인이 될 때까지 지역을 벗어나 본 기억이라고는 현장 체험학습이 전부인 나에게 파격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별다른 대책도 없었다. 그냥 우선 어디로든 가다 보면 길이 없을까, 사람 한 명 일할 곳이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포항으로 왔다.

포항은 바다가 가까운 도시였다. 어느 동네에 있어도 바다를 보려면 차를 타고 30분만 가도 바다를 볼 수 있다. 삼 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대구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처음 포항에 와서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바다를 보러 왔다. 딱히 와서도 할 일은 없었지만, 마냥 이 푸르른 바다를 보고 있자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작아진 내 마음이 다리미로 펴지는 기분이었다. 별거 아냐 하고 철퍽철퍽 치는 파도가 말해줬다.